이신플러스의 달콤쌉싸름한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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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그것의 고찰



필자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군대에서 많은 책을 읽었는데, 이번 진중문고 목록을 받았을 때 이미 그중 반절의 책들을 읽은 상태였다. 하지만 필자는 읽은 책의 기억을 더듬어 독후감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는 이번 기회로 한권의 책을 더 읽고 싶었던 마음이 크던 까닭이다.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절반의 리스트의 책 중에 나는 상당히 쉽게 한 책을 고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책 제목의 흥미가 아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목록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필자가 존경하는 첫 번째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나로 하여금 가슴 뛰게 만드는 경험을 만들었는데, 내가 무라카미 선생님의 소설을 찾기 시작한 것은 ‘1Q84’3권까지 3일만에 독파 하게 만든 후 부터였다.

그의 소설에는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있었고, 나는 그 힘을 즐거워했다. 그 이후 나는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등의 무라카미 선생님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은 히가시노 게이고, 니시오 이신 등의 다른 현대일본 문학 작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필자가 군 입대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 이유를 필두로 필자는 진중문고 리스트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제 네무리)’ 이라는 책을 선택하는데 고민은커녕 반가움 마저 느꼈다.

은 나에게 기대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것에 대해 나는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준 진중문고에 고마움을 느꼈다. ‘1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동시에 아트소설(art novel) 이기도 했다. ‘은 시작부터 강렬한 이미지의 삽화(일러스트)를 도입했는데, 무라카미 작품에서 삽화를 도입한 책을 본 것은 처음이였지만, 내가 놀란 점은 그 점이 아닌 삽화의 포스(force) 때문이였다. 대부분의 삽화들은 내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하거나 차단해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러스트 소설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필자였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와 카트 맨쉬크(독일 일러스트레이터)의 만남은 상호 보완을 뛰어넘어 새로움을 창조하는 경지에 나는 놀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봐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각 소설들에서 필자는 그 신비로움과 그 속에 해석되는 사회비판적 태도와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의 취미가 들어있는 음악관과 소설관 규칙적인 생활습관 등을 좋아했는데 은 단편소설이지만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카트 맨쉬크의 일러스트가 소설 그 이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유하자면 지구에게 태양과 달 둘 중 하나만 사라져도 지구에 큰 치명적인 결과를 이루는 것에 비유하고 싶다.

소설부분은 태양이고 일러스트는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이지만 지구에게는 자신의 공,자전궤도 책임지고 조석간만의 차를 만들어 주는 달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은 무라카미 특유의 신비의 묘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필자에게 이란 무엇인가의 일차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주위사람들과 심지어 가족과도 다른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잠들어 버린 세계에서 자신 혼자만이 여러일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며 안나 카레니나라는 톨스토이의 걸작을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점점 세계와는 멀어지지만 가족들조차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주인공은 자동차 안에서 검은 그림자에게 당하는 위협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움크려 울면서 작품은 끝난다. 주인공이 겪는 기묘한 일과 무라카미의 기묘하고 담담한 문체 그리고 카트 맨쉬크의 기묘하고 섬뜩한 삽화는 이 책의 포인트이자 말하고자 하는 점이 였다. 인간은 왜 잠을 자는가?

인간이 잠을 자는 이유는 확실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연구결과들은 뇌의 재활성화(호르몬,면역력 등 잠으로 인한 모든 이로운 효과 등은 입증 되어있다)를 뒷받침 한다. 하지만 단편소설 은 잠이란 죽음에 대항하는 원초적인 공포를 완화하는 수단으로써의 의미가 강하다. 마지막 주인공이 검은 그림자가 행하는 위협에 작은 상자라고 표현되는 자동차안에서 움크려 울음을 터트린 장면이 내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잠을 오랫동안 안 잔다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고통이 될 수 있다. 고문 중에 수면방해 고문이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에 따라 잠은 죽음에 적응하는 일시적인 죽음 즉, 죽음을 경험해 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잠을 박탈당함으로써 세상에 혼자 고립되어 버렸고 그에 따라 느끼는 공포감은 죽음 그 이상이였을 지도 모른다.

필자는 공포를 부정하지 않는다. 공포라는 감정이 있었기에 인류는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생명위협의 공포로 인해 주거수단과 방어수단이 발달했고 고립의 공포로 통신수단과 이동수단이 발달한 점에서 공포는 필요한 감정이다.

그런 필자에게도 잠을 싫어했던 시절이 있었다. 잠을 자는 시간에 자기계발을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을 읽고 난 필자는 그 생각의 방향을 고쳐야했다. 인생의 1/3의 잠으로 죽음에 적응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이후의 무한한 시간을 또한 적응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잠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이 모든 기회를 통해 나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준 그리고 경험을 준 군대에 감사하며 그리고

군생활 동안에 즐거움을 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감사하며 담담하게 이어간 필자의 글을 마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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